E북 읽고싶음+부모님 생일케이크 마련으로 여는 커미션입니다 ㅇ0ㅇ)/
슬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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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ㅇ님 - 틱택토 라이알버(꾸금….)
ㄹ님 - 아이나나 유키모모
BL/GL/HL/논커플링 모두 가능.
공미포 1000자에 3천원, 1회 최대 5천자로 생각중이지만 협의하고 조정할 수 있습니다!
고어·수위(는 성인 확인 후에) 가능하지만 수위는 한번도 써본 적 없어서 제 첫 수위작을 받아가시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특화 장르 : 시리어스, 덤덤한 개그?(별로 웃기지 않습니다) 개그? 진지하지 않은 분위기는 첫 번째 샘플로→→
2차 연성의 경우에는 협의 후에, 모르는 장르도 쓸 수 있지만 적절한 캐해석을 알려주셔야 가능합니다!
(주력 장르 : 페이트, 아이나나, 단간론파(뉴단 제외), FF14(~창천), 쿠로코의 농구, 틱택토, 언라이트, 앙스타 등)
이 외에도 꽤 많으니 문의 주시고, 모르는 장르여도 상세한 설명이 있으면 작업 가능합니다.
AU, 드림 얼마든지 가능하며 어느정도의 캐붕도 괜찮습니다(?)!
1차 연성의 경우에는 자캐관계/자컾/only창작 모두 가능합니다!
2차보다 더 세세한 캐해석을 주셔야 원활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커미션 진행은 <소재 및 장르 협의→작업→컨펌(→수정)→전달> 순으로 진행되며, 작업 단계에서는 전액 환불 불가능합니다.
작업기간은 최대 한달이며, 빠른 작업도 가능하지만 과제와 시험에 치여 살고 있어 일부러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ㅠㅠ)
원하는 방식으로 완성본을 드립니다. (예 : 에버노트, hwp, 텍스트, 이미지화 등)
완성본은 추후 커미션 재개장 시에 샘플로 쓰일 수 있으며, 저작권은 모두 저에게 있습니다.
신청서 양식
연락 가능한 트위터 아이디/메일 주소 :
장르(1차·2차)와 형식 :
간단한 소재·내용·분위기 :
꼭 들어갔으면 하는 부분 :
샘플 (2차)
이 책, 여기에 있었군….
읽을 책이 떨어져서 새 책 구매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서재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책장의 한 구석에는 두껍고, 파란… 아무튼, 내 전공책이 꽂혀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하는 의문이 솟아났다. 팔락팔락, 얇은 종잇장이 넘어간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한 건 아니라, 그닥 낡지 않은 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으음, 양심이 찔린다. 이만 덮자. 라고 생각하던 찰나, 구석에 잉크 펜으로 휘갈겨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알버트? 무슨 책 읽어? 책을 읽으며 그렇게 끙끙대다니, 무슨 추리 소설이라도 읽냐?”
라이오넬이 뒤에서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책을 덮었다. 별로 찔릴만한 일도 아닌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지 마,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다시 그 페이지를 폈다. 라이오넬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관심이 많다.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아무튼 사사건건 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 영문학 책을 보고선 윽,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건 왜 보고 있어, 재미없게.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싫냐… 나는 이걸 말 할까 말까, 하다 입을 열었다.
“재밌는 낙서가 적혀 있어서, 추리를 좀.”
“추리? 네가? 대체 뭔데?”
이 자식은 아마도 나를 노력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잉여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뭐, 틀린 건 아니다. 나는 해당 페이지를 크게 펼쳐 라이오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라이오넬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글씨에 나를 노려보았다.
“이게 뭐냐. ……싸우자는 건가?”
“내가 쓸데없이 시비나 틀 사람으로 보여? 너도 아니고.”
자고로 시비란 건 이렇게 트는 거다. 라이오넬이 이 자식이, 하곤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봤자 때리지 않는다. 아마 나는 저 주먹에 한 대만 맞아도 쓰러져서 의식을 잃을 것이다. 라이오넬은 그걸 알고 있다. 일단은 주치의니까.
아무튼, 내가 보여준 페이지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라이오넬 개자식」
* * *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대체 이 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말이 쓰여 있냐 이거지. ─라는 내 말을 듣고 라이오넬이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책에다가 사람 욕이나 써 두다니. 좀생이 같긴.”
“시끄러워… 난 네가 그에 합당한 일을 했을 거라고 의심치 않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파 위에 팔을 걸치고 날 내려다본다. 나는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말겠어. 그러자 라이오넬은 네, 네~. 하면서 차를 타 온다. 우리는 책상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두고 마주앉아 토론을 시작했다.
“중세 영문학 과목은 2학년 때 필수로 들었던 전공이야. 그때쯤 우린 뭘 하고 있었지?”“뭐… 같이 살았겠지.”
굉장히 떨떠름한 답변이군.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2학년 말인 것 같아. 415페이지에 써져 있는 걸 보면… 아마 겨울이겠지. 라이오넬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기억력을 못 믿어?”
“너를 믿을 바에야 마당에서 자고 있던 시저를 믿겠다…….”
너무하는군. 시저가 영리하긴 하지. 어쩌면 너보다 똑똑할 지도 몰라…. 라이오넬은 내 대꾸를 그냥 헛소리로 넘겼다. 나는 진심인데. 아무래도 라이오넬은 도와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떠올려 봐. 네 죄인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을까?”
“모르겠군, 나는 결백해.”
라이오넬은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네 양심은… 저녁 식사 이후에 시저의 밥그릇에 남은 사료보다도 더 얄팍하구나…….”
“비꼬는 실력이 늘었지만 너무 장황해서 별로 와 닿지 않는군.”
실패했다…. 나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 이윽고 협상을 시도하기로 했다. 뭐가 좋을까, 돈?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좀…. 봉급을 올려주기에는 너무 사소한 사건이 아닌가? 하지만 궁금한걸. 라이오넬이 좋아하는 것… 차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외에는 무형의 것들, 스포츠라던가.
“내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찾으면 산책 시간을 15분 더 늘리겠어.”
“쪼잔하긴… 15분이 뭐냐? 20분도 아니고. 아무튼 좋아. 자세히 말해 봐.”
효과가 좋군. 말로는 언제나 내 정신건강을 깎아먹는 녀석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육체의 건강은 챙겨준다. 주치의고 말이야. 양심은 있군. 아마 이 말을 그대로 전하면 자신은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쪽은 케어해 줄 수 없다고 얘기할 거다. 그러고는 산책 시간을 더 늘리라고 권하겠지. 햇볕을 쬐면 우울증이 개선된다고 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우울증 따위가 아니다. 그냥… 조금… 체력이 부족하고, 많이 귀찮을 뿐이다.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야 해. 시기를 특정 짓지 않고서 찾을 수는 없지.”
나는… 예습이나 복습을 성실하게 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니…… 강의 시간에 썼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도. 덧붙이자 라이오넬이 나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공부도 교우관계도, 심지어 여자까지 놓치지 않았던 라이오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여자는 있었어…. 라고 뻔뻔하게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그 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어, 없어? 라이오넬이 특유의 자신만만한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 * *
몇 주 후, 저택으로 편지가 왔다. 위치는 윌프레드 저택, 수신인에는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묘했다. 나는 이미 그의 앞으로 온 편지를 읽었다가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상상까지 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뜯어보지는 않았다. 이런 곳 까지 러브레터가 올 리는 없지만 다른 사람 앞으로 온 편지를 뜯어보는 건 어쨌든 실례니까. 내 얘길 들은 라이오넬이 아, 그거. 하는 얼굴을 하며 종이봉투를 찢었다.
“네 기억력은 역시 믿을 게 못 돼.”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중세 영문학 과목은 3학년 때 배우는 과목이며 그마저도 2학기가 아닌 1학기라고.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편지의 발신인에게 그 사람 기억이 잘못 된 거겠지! 하고 반박했지만 흰 봉투 위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친애하는 라이오넬 이스터브룩 군에게, 마틴 그레이엄이. 우리 과 지도교수셨다. 이 자식은 어쩜 이렇게도 발이 넓지… 나는 한탄했다.
“어떻게 다른 과 교수를 알고 있는 거야? 아예 다르잖아. 문학과 의학이라고?”
“교수들은 어차피 학생 이름 일일이 기억 안 해. 자기네 수업을 들었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겠지. 왜 이런 걸 물어보냐고 적혀있긴 했는데, 굳이 답장 하지 않아도 곧 잊으실 것 같고.”
발이 넓은 게 아니라 뻔뻔한 거였군. 저 뻔뻔함의 3할 정도만 닮아도 세상을 수월하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아쉽군.
“날짜는… 긴 휴강 같은 사유가 없었을 경우에 6월 끝물인 것 같아.”
“초여름이군. 네가 술과 사교계에 빠져 집을 자주 비웠지. …여름밤에 너를 기다리며 달을 보았던 기억이 나.”
아련하게 이야기 하자 라이오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봤다. 농담이다, 농담.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흥! 하는 의성어가 어울리는 장면이라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네가 집에 영 들어오지 않았던 건 진짜야.”
“나도 알아.”
그 말을 하고서야 내가 이전에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참, 3학년 말에는 같은 집에 살지 않았었지……. 굳이 지적해 주지 않은 그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젠 별로 상관없지만.
“흠… 적당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집에 들어오질 않아서 잔소리 할 시간도 없었을 것 같은데.”
“고작 잔소리 좀 했다고 남의 험담을 전공 책에 적어놓는 녀석이라고 자백 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그랬겠어.”
그런 일로 라이오넬 개자식을 외쳤다면 책뿐만이 아니라 노트, 심지어는 책상과 벽지에도 라이오넬의 욕이 적혀 있을 터였다. 내가 그럴 리가 없지. 음, 그렇고말고.
“내 물건에 멋대로 손을 댔다던가?”
“그건 너겠지.”
기억력도 좋은 자식…반박할 말이 없다. 너무하는군. 아무튼 더 이상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사실 라이오넬이 내 물건에 손을 댄 일이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궁금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궁금해지고 있다. 이게 다 라이오넬이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당 떨어져. 단 거 먹고 싶어….”
“티 푸드로는 충족이 안 돼?”
“이게 달아? 네 혀는 망가졌어.”
“충분히 달아. 그리고 내 혀는 멀쩡해. 단 게 먹고 싶으면 하녀에게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지그래?”
“그럴까… 필링이 가득 들어간 사과 파이가 좋아.”
“나한테 말해봤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나가 만드는 파이 솜씨는 일품이지. 특히나 바삭한 파이지가 특기다. 라이오넬은 주면 잘 먹으면서 가끔 이렇게 튕기곤 한다. 가져다주면 잘 먹을 거면서!
“니나, 있어?”
주방에 보이지 않아 다락에 들러 니나를 찾았다.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이미니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긴, 제일 열심히 하긴 하지… 방해하기 미안해서 다시 라이오넬의 방으로 돌아갔다. 라이오넬이 “말했어?” 하고 물었다. 나는 바빠 보여서… 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넌 고용인들에게 너무 물러.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라이오넬의 시선이 따끔따끔 박혔다.
“라이오넬, 심부름 하나 할래?”
“누굴 부려먹겠다고?”
“나는 시내까지 다녀올 기력이 없어….”
“마차를 불러, 마차를.”
차마 스위츠가 먹고 싶으니 시내까지 다녀와 줄래? 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라이오넬은 내 목을 조를 것이다. 나는 기절하겠지. 라이오넬은 능력 좋은 의사니까 적절한 응급처치로 나를 무사히 살려낼 것이다. 라이오넬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구해지다니 이제 더는 싫다. 이런 일로는 더더욱.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라이오넬이 개의치 않고 차 한 잔을 더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으로 돌아간 나는 편지를 썼다. 비비안에게.
* * *
“이봐, 남작님. 싱 여사께서 친히 편지를 보내셨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편지? 올 일이 있었나, “줘 봐.” 봉투를 받아들었다. 호칭을 보면 또 멋대로 상상을 하고 성이 난 모양이다. 정말이지, 십 년 전과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넌 참 한결같구나…. 내가 한숨을 쉬자 라이오넬은 정신줄을 부여잡은 듯, “…무슨 일인데.” 하고, 부루퉁하게 물었다. 기다려 봐, 몇 주 간에 걸친 우리의…가 아니라, 내 의문이 풀릴 참이니까. 요약하자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새로 생긴 가게의 타르트라니, 기억에 없는걸요. 저 외에도 다른 여자가 있었나요? 당신이 그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라이오넬을 노려보았다. 라이오넬은 왜 그런 눈으로 보냐면서 미심쩍은 눈으로 편지를 받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아주 의심병 환자다. 대화로 해결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러는지, 나보다도 발전이 없는 녀석이다. 이 말을 라이오넬에게 한다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므로 하지 않았다. 나랑 비교당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낼 녀석이다.
어쨌든 나는 그 여름날을 기억한다. 내가 비비안과 사귀던 시절, 그녀를 위해 몰래 런던에 신장개업한 가게의 인기 타르트 세트를 사러 외출까지 했던 날이다. 그때의 나는 정말 사랑에 모든 걸 던질 수 있었던 용감한 남자였던 모양이지…여인네들이 가득한 가게에 빼곡한 줄을 서면서 땡볕 아래서 모자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 고통스러운 30분을 견디고 집에 돌아와온 즉시 침대 위에 쓰려져 무려 열두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그 타르트는 행방을 감춘 뒤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이오넬의 위장에서 소화되는 중이었겠지.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라이오넬 개자식.
문제는 이 사건을 라이오넬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까, 라는 거다. 비비안의 V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킬 녀석이라. 물론 과장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를 놀리는 건 아닐까? 사랑과 목숨을 맞바꾸려 했던 대학교 2학년의 윌프레드 남작님… 하고 말이다.
“아아, 그 타르트. 그 여자를 위한 선물이었군.”
기억하고 있었어? 결백하다는 건 역시 다 거짓부렁이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아무튼 생각보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일이지. 사실 조금 짐작은 갔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친, 그 치열한 사투의 전유물이었던 그 타르트를 자신이 몽땅 먹어버렸다는 것에 쌤통이다, 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짜로 나쁜 놈이다. 그때는 여자친구에게 화제의 디저트를 사주려고 가게에 줄을 섰다는 사실을 라이오넬에게 말했다가는 놀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했지. 그냥, 억울한 마음에 침대에서 혼자 훌쩍댔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2학년 여름이었던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너야 기억 못 하겠지! 뙤약볕 아래에서 줄을 서 그걸 쟁취해 낸 건 나였으니까!”
“네 기억력은 이제 믿지 않기로 했어.”
그러면서 라이오넬은 외출할 준비를 했다. 어디 나가? 내 물음이 무색하게 나 역시 끌고 나가졌다. 라이오넬은 이렇게 말했다.
“뭐 해? 확인하러 가야지.”
사용인을 시켜 마차를 부르고, 외투를 입혀진 다음 강제로 마차에 올라탔다. 내가 다녀오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순 자기 좋을 대로만 한다. 내가 끙끙대며 떠올리려던 걸 보며 흥미가 생기긴 한 모양인지, 같이 가 주는 게 우습고 어이가 없다. 니나가 만들어 준 사과 파이는 이미 먹었지만, 괘씸하니 라이오넬에게 과자를 사라고 해야겠다.
* * *
오랜만에 도착한 런던 시내는 떠들썩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딱 질색이야…. 힘 빠진, 개미만 한 목소리에 라이오넬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 가게, 어디에 있어?”
“몇 년 만에 가는 거라 나도 도통….”
노려보는 라이오넬의 시선에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번화가는 북적거려, 자꾸 다른 사람과 부딪힐 뻔한 것을 라이오넬이 정신 좀 차리고 다니라고 길가 쪽으로 위치를 바꿔 주었다. 뭔가… 깨지기 쉬운 자기 인형 취급을 받고 있다. 그렇게 약하진 않은데. …아마도.
“저긴가…?”
얼핏 기억에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많은 것 같긴 했지만, 예전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역시 그건 새로 생겨서 사람들이 몰린 것 뿐이었군. 갑자기 억울함이 다시 솟구친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줄을 섰는데… 약간 실망한 나를 두고 라이오넬이 먼저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카운터 옆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나는 이렇게 성비가 맞지 않는 곳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라이오넬을 보며 감탄했다. 영국 신사의 귀감이다.
라이오넬은 몇 종류의 타르트와 쿠키, 그리고 머핀을 주문했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도 머쓱해서 그 맞은편에 앉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자신만만하게 웃은 라이오넬은 카운터의 직원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런던에는 오래간만에 오는데, 새롭게 생긴 가게들이 많군요. 실례지만, 언제 개업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머, 정말 간만에 오신 모양이네요. 저희 가게, 생긴 지 꽤 되었거든요.”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접어가며 햇수를 세고 있다. 정말로 2학년 때의 일이군. 아마 그 낙서는 이 일 때문이었겠지. 의문이 풀렸는데도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다. “이런 곳에 신사 분들이 오시는 건 드문 일인데, 그것도 두 분이나.” 하는 종업원의 말에 “여동생의 생일이라서요.” 거짓말을 하며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다 넘어갈 것 같은 미소를 짓는다. 정말이지 뻔뻔하다.
“주문한 거, 네가 사.”
“돈도 많은 녀석이 쫀쫀하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봉급이나 좀 올려줘라.”
좋아, 양심은 있군. 어릴 적에 보트 타다가 호수에 떨어뜨린 줄 알았는데. 봉급을 올려달라는 라이오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동화 책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인테리어다. 나와는 달리 신사의 덕목 중 하나인 모자를 쓰고 있다가, 테이블 위에 벗어 둔 라이오넬은 모자 장수처럼 보였다. 수식어가 하나 빠졌지만. 이런 분위기, 나와는 역시 어울리지 않아…. 라이오넬이 “응?” 하고 나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주문한 스위츠를 기다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집안이 어쩐지 조용했다. 캄캄한 거실은 아무런 대답 없이 소년을 안으로 들여보내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갑작스럽게 잡힌 유닛의 라이브 일정이 가족여행 날과 겹쳤었지. 그래도 모처럼만에 들어온 일이었으니까, 절대 빠질 수도 없었고 말이지. 꽤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무대 위에 오를 때는 언제나 처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 뿐이라서, 정말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른해… 피곤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또 배도 고팠다. 조금만 버티면 꼬르륵대는 소리가 거실에 울릴 것 같아서 비척비척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뭔가 남은 게 있지 않을까. 어제 먹던 카레라던가.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가스렌지 위에 올려져 있던 냄비가 깨끗하게 씻긴 채 뒤집어져 있는 걸 보고는 깨달았다.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었구나….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와버렸다. 간단하게 끼니라도 때워야지. 밤공기가 꽤 쌀쌀했다. 집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맘때에는 금세 추워지고 마니까. 얇은 옷 위에 또 얇은 가디건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매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빨리 갔다 와야지, 발걸음을 빨리했다.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이라도 먹을 생각이었지만, 점원이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5분이 지나서도 카운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면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결국 동네 마트에 가서 재료를 잔뜩 샀다. 이걸로 며칠간은 괜찮겠지. 집에 가서 다시 요리를 해야 한다는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매일매일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으슥한 지름길로 발을 돌렸다. 벼, 별로 무섭진 않으니까. 확실히 큰 길 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그것보다는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가로등이 더 신경쓰였다. 으스스한 느낌? 아니, 조금 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말 사람이 없구나….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보았다. 밤하늘을 건너는 누군가를.
하늘에 사람이 있어. 잘못 봤나? 눈을 부빗거렸지만 그 사람이 지나간 발자취가 은하수처럼 하늘에 길게 뻗어있었다. 신기하네, 무슨 일일까.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몰래 남의 비밀을 캐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집으로 달려가버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현관문을 꼭 닫고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뭘 하려고 했더라? 맞아, 저녁을.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보고 나서야 어째서 밖에 나갔다 왔었는지 떠올렸다. 이상하네. 외투를 벗고, 손을 씻고.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재료를 꺼냈다. 감자와 양파, 당근을 썰고, 다지고, 볶고. 완성된 요리의 맛은 그래도 역시나, 평범하게 맛있었다.
조금 피곤했지만 자고싶지 않았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조금 늦게 자도 괜찮을 것 같고. 휴일을 만끽한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아직 휴일은 아니지만. 침대에 누웠지만 졸리지 않았다. 머리맡의 창문으로 보인 까만 하늘에 오던 잠도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컴퓨터를 켰다. 기차는 아침 일찍부터 있었다. 적당히 아침을 먹고 가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8시 반 경 표를 예약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다.
알람시계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표를 버릴 뻔 했다. 부스스한 머리가 빗어도 빗어도 가라앉지 않아 손으로 누른 채로 집을 나왔다. 여느 아침처럼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외치며 현관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이다. 기차를 혼자 타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역에 도착해서, 별 일 없이 표를 뽑은 후에 무사히 탑승했다. 작게 덜컹거리는 기찻소리에 잠이 올 것 같아서 계속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어라, 졸았나…. 눈을 끔벅끔벅 떴다 감았다 하고 있으니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목적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는 작게 웃었다. 손에, 표를 쥐고 있길래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오른손에 기차표가 쥐여 있는게 보였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더라, 분명히 주머니 안에 넣어둔 것 같은데. 어찌됐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내렸다. 다행이다, 큰일 날 뻔 했네.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걷기를 반복하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영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주변에 있는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곧 있으면 시작이려나, 건물로 들어가 수 분 뒤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에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있었지. 체험학습 같은 느낌이었는데. 조금 감회가 새로웠다.
또 만나네요.
아까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여성이었다. 목적지가 같았구나. 신기한 일이었다. 요즘 신기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은데, 우연일까? 언제나 비일상같은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노릇이었다. 함께 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도중,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작하나봐요. 곧이어 전등이 꺼지고, 천장과 벽에는 밤하늘이 펼쳐졌다.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하여 트로이에 가게 되고, 양을 치던 가니메데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그는 독수리의 발톱으로 가니메데를 붙잡아 천상계로 데려가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주고, 신들이 마시는 넥타르라는 음료를 부어…….
아, 이건 들은 적이 있는 얘기였다. 분명, 물병자리의…. 뒤로 넘어간 좌석 시트에 기대어 눈앞에 펼쳐진 밤을 보았다.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예쁘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사랑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떠올라서, 고개를 휘휘 저어버리고 말았다. 둥근 돔 모양의 천장에 펼쳐진 별들, 밤하늘을 걷던 사람. 그게 누구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천장의 별은 반짝반짝 빛나, 어릴 적에 방 하늘에 빼곡히 붙여두었던 야광별들의 무리를 보는 것만 같다. 은하수를 건너고 있어. 둥실둥실 떠다니는 감각. 눈동자는 반짝거림으로 가득히 빛난다. 하늘에 펼쳐진 별무리를 따라가서….
재미있었나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는걸요.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기 전 잠깐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눈높이가 꽤 차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높은 굽의 구두까지.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구나. 우리는 그대로 작별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의 기차에서는 졸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깨워줄 사람이 없으니까.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하품이 연거푸 나왔다. 오랜만에 조금 멀리까지 다녀왔다고 이모양이라니. 라이브 연습을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더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잠깐 돌아다녔을 뿐인데 벌써 어물어물 해가 져가고 있었다. 수평선의 노을이 점차 땅에 스며들어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 까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요일 아침은 어지간히도 일찍 일어났다. 피곤해서 빨리 자버렸던 탓일까, 아직 동이 채 뜨지도 않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하품을 한번 하고, 평소에는 잘 읽지 않는 아침 신문을 집 안으로 들여두고. 창밖에 떠 있는 금성을 바라보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너무 춥잖아…. 잠옷 위에 얇은 담요를 걸치고 한참을 새벽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에취! 하는 자신의 기침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 나쁜 예감이 드는데…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좀 더 쉬지 않으면. 창문을 닫고 다시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간밤에 창고에서 찾아낸 야광별이 방 한구석의 책상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손가락 끝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전화… 받아야 하는데. 눈꺼풀은 어찌나 무거운지 다시 한 번 감기더니 떠지질 않았다.
어라, 앞이 안보여. 감기라는 건 시력까지 빼앗아가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눈 위에 무언가 올려져 있는 것 같았다. 뭐지? 두껍고 축축한 게…. 조금 힘을 내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토모야군?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 부장? 꿈이라도 꾸는 걸까,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그래, 역시 꿈인가봐. 몸을 돌려 다시금 누워 눈을 감았다. 나 참, 그렇게 누우면 수건이 떨어진다구요? 다시 천장을 향해 눕힌 후 물수건을 뒤집어 이마 위에 얹어주는 부장. 눈이 보이지 않았던 건 수건이 눈꺼풀을 덮어서였나보다. 역시 꿈이 아니잖아…?
이런 날씨에 창문을 열어두고 자다니, 배짱이 좋네요? 뭐, 그 덕분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지만… …아이돌에게 건강관리는 필수라구요?
뭐? 창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이야? 수상한 사람을 보듯 쳐다보니 그제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구요, 알려주신 곳에 열쇠가 없어 곤란한 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무단침입을 하다니, 이 범죄자! 하고 말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모습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대뜸 면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너무 밝긴 하지만.
토모야 군의 부모님이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말이죠, 평소에는 벨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는 애가 대낮이 되도록 집 전화며 휴대전화며 연락이 안 된다고. 혹시나 해서 와보니 역시나네요. 밤공기를 쐬기에는 조금 쌀쌀한 날씨라고 생각하는데, 창문도 닫지 않고 말이죠.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네요, 토모야군.
시끄러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목소리가 나왔다. 잘, 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쇳소리 나는 정도인가. 뭐, 창문을 열어둔 건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제대로 닫지 않고 잔 것뿐이겠지…. 요즘 이상한 취미가 들어 밤마다 별을 본답시고는 열어둔 창문이 복병이었을 줄이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부끄러워서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하러 온 데다 간호까지 해 준건 고맙지만, 우리 부모님과 아직도 그렇게 연락을 하는 사이라니. 이러다가 알게 모르게 넘어가 버리는 건 아닌 가 몰라. 어쩐지 조금씩 말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먼데까지 여행을 가질 않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꽤 조마조마 하답니다? 역에서 우연찮게 마주쳤을 때에는 호기심에 따라갔지만…
예상은 했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 주말엔 정말이지 평범하게 한가하구나. 한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기침이 먼저였다. 누워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려니 사레가 들린 듯 멈추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걸린 거람. 기침의 반동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환자니까, 이불이나 꼭 덮고 있으세요.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닌 모양이네요…?
그래도, 이제 괜찮으니까 이만 가도 될 것 같은데…. 쉬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고. 올려다보지 않고 대꾸했지만 중간의 콜록거리는 소리 때문에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결국 부장은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떨어져버린 물수건을 다시 머리 위에 올려주고서는 부엌에서 죽까지 만들어다 주고, 부모님과 동생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저녁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아파서 그런 건지 어째선지 그게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지만 말로 하기에는 스스러워서, 짧은 문자 한 통 조차 남기지 못하고선 바로 잠이 들었다. 물론 잠들기 직전에 창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날은 몸 상태는 괜찮아졌지만, 노래 연습을 할 수 있는 목 상태는 아니어서 유닛 연습을 하루만 쉬기로 했다. 안무나 퍼포먼스 연습은 상관없지 않나 싶었지만, 니쨩도 하지메도, 미츠루까지 몸 상태가 나쁠 때는 쉬어야 한다고 타박을 주니 딱 하루만 쉬겠다는 약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 김에 동아리에 잠깐 들렀지만, 부장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건지 호쿠토 선배가 얼른 돌아가 쉬라며 문 밖에서 나를 꾹꾹 밀어냈다. 서럽다…. 라곤 해도 다들 걱정해주고 있는 거니까. 또 창문을 열기는 또 뭐해서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야광 별들을 이곳저곳 붙였다. 살살 붙였으니까 잘 떼어지겠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무언가 부족해서 흰 종이로 종이학을 하나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런 걸 왜 하는 걸까, 스스로도 궁금했다. 금방이라도 점멸할 것 같은 희미한 별들을 보며, 정말이지 푹 잠들었다.
맞아. 이건 역시 이상한 취미야. 아니, 별을 보는 게 이상하다는 얘긴 아니지만… 이 날씨에 옥상 위로 올라와서까지 밤하늘을 보려는 게 이상하다는 얘기였다. 학교에서 유닛의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푹 쉬다가, 갑자기 나와 버렸다. 부모님에게는 편의점에 간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이상하다, 이상해. 그래도 충분히 두껍게 입고 왔으니 감기는 괜찮겠지. 겉옷에 팔이 꿰여 영 불편했다. 너무 추워서 딱 나는 펭귄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껴입었다. 뭘 하지… 올라왔지만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뭘 보고 싶었던 걸까, 얼마 전에 플라네타리움 안에서 들었던 물병자리 이야기가 생각나 밤하늘에서 그 흔적을 되짚었다. 잘 보이지 않는데, 이제 곧 겨울인가보다. 장갑을 낀 손도 슬슬 시리기 시작해서, 슬슬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밤하늘을 걸었던 그 사람, 이제는 보이지 않는 걸까. 스스로 생각한 것에 혼자 놀라 아, 하고 혼자 내뱉었다.
조금만 더 있어 볼까, 목도리를 다시 고쳐 맸다. 휴대전화를 꺼내 이전에 보내려다 만 메일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때 와줘서, 간호해줘서 고마웠어요. 보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사실 손이 얼어서 지우려다 실수를 한 거라고 자신에게 변명을 해보았지만, 어차피 자신의 성격상 언젠가는 해야 했던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또 감기라도 걸려버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니까. 제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옥상 위 난간에 무언가가 사뿐히 올라서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건가요, 또 감기에 걸려버린다구요? 익숙한 목소리에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밤하늘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경험, 맞아. 인생이란 건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어.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는 둥 마는 둥, 편하게 누워 잠들기 직전의 졸린 눈을 하다가 마치 「유레카!」하고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그렇게 외쳤다. 그의 머리 아래에서 무릎을 빌려주고 있는 세나 이즈미는 뭐야?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원래 이런 녀석이지. 하고 다시 텔레비전 너머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이 정도 일에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다 보면 귀찮아지는 건 어차피 자신이라는 건, 이미 옛적에 알아챘다. 뭐, 신경 쓴다고 해도 이 녀석이 하고 싶은 일에 멋대로 손을 대 막을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츠키나가 레오의 기행이란 정말 예측을 뛰어넘어서, 그 방에 들어가 한참을 부스럭대는 것을 보다 못해 또 뭐야? 하고 물었더니,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하면서 짐을 싸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것도 적당히 해야지, 집 밖을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아 저기, 아무리 그래도 목적지 정도는 알려주지 그래? 했더니 저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으음…음…. 하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역시 모르겠어! 하지만 다녀올게! 하고는 열렬한 작별의 키스를 퍼부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현관문은 닫힌 채였다. 언젠가 혼자 집 안에 틀어박혀서는 나오지 않았던 날들의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 졸업하기 직전에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 방랑벽이, 함께 살면서 조금 나아졌다 싶었는데 되려 배는 더 심해져 있었다.
커다란 침대에서 홀로 일어나는 아침은 또 각별했다. 하루 이틀 정도면 이런 생활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혼자 먹는 아침은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졸업 후에 거의 작곡에 매진하고 있는 츠키나가 레오와는 달리, 세나 이즈미는 계속 연예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고, 원래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계란 프라이의 노른자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노른자 담당이었던 모 츠키나가 씨는 휴대폰 전원도 끈 채로 행방불명이었다. 비행기라도 타고 있는 거 아냐? 괜스레 열이 받쳐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계란을 내리찍었다. 반숙이 터져서 온통 노른자 범벅이 됐다. 이런 쓸데 없는 이유로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린 건 또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결국 스케줄 시간이 다 되어 새로 부쳐먹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세나 이즈미가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의 작곡가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까다로운 그의 곡 취향 때문이기도 했고─자신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곡을 뽑아내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으니─전속이라고 칭해도 좋을 만큼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한 곡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곡의 녹음날인데도 불구하고 작곡가 장본인은 먼 나라 어딘가에서 찍은 일출 사진이나 보내오고 있으니, 짜증이 나도 단단히 날 수밖에 없었다.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꺼버렸다. 먼저 들려주나 봐라, 앨범 사서 들으라지. 연습은 주로 집에서 했으니 그의 노래를 가장 처음 들은 사람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지만, 기왕이면 다시 들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원래 정신이 먼 곳에 가 있는 녀석이니 아마 발매일이 훌쩍 지나도 모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다행히도 녹음은 별 탈 없이 잘 끝났고, 그날은 다른 데에 신경을 둘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였다. 이런 하루가 며칠이고 반복되니 이제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늘은 어디서 자빠져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긴, 걱정도 아까웠다. 해외에서 기념품 가게에서 산 것만 같은 엽서로 편지가 도착할 즈음에는, 대체 어디까지 가보려는 걸까 궁금증이 들 정도였다.
아, 세나 선배? 신곡 잘 들었습니다. …음, 다름이 아니라 Leader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 싶어서요. 네? 아뇨, 다들 연락이 안 되신다고 하시길래…. 저도 새로운 곡을 의뢰 드릴 참이었거든요. 아하, 갑자기 여행이라…. 여전히 Crazy…가 아니라 Marvelous한 분이시네요. 흐음,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르시나요? 원래 그런 사람이시긴 했지만…. 네, 감사합니다. 쉬고 계시는데 방해해버렸네요. 괜찮으시다면 돌아오셨을 때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네…….
연락 수단은 나날이 다양해져만 갔다. 문자에 이어 엽서, 이메일, 마침내는 택배까지. 용케도 분실되지 않고 이런 빠른 시일 내에 도착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 녀석 사실은 가까이에 있는 거 아냐? 매번 발신지가 다르니 답장을 할 수도 없고, 적당히 하고 오라는 이메일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돌아오면 죽일까? 그런 마음으로 골판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말린 들꽃 같은 풀들이 가득 담겨 있었고 하얀 케이스의 CD가 한 장, 투명한 케이스에 한 장, 그리고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걸어 다니면서 쓰기라도 한 건지 글씨가 아주 괴발개발이었다. 답지 않게 존칭으로 시작하는 편지의 서두가 신기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세나 이즈미 씨. 무사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모처럼 먼 곳까지 여행을 와서 문명의 이기 따위로 연락을 하는 것도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로 말을 전해봅니다. 지금까지 보냈던 것들은 잘 도착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이것도 보내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얼마 후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 기다리기 힘들어 앨범을 구매했습니다. 나중에 받으러 갈 테니,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감상은 나중에☆
정말로 멀쩡한 어투의 편지에 뒷면에 장난이라도 쳐 놓은 걸까, 혹시 앞머리만 따서 읽으면 다른 문장이 된다거나. 결국 참다못해 마지막 문장은 평소와 같은 언행이긴 하지만. 언뜻 스쳐 지나가듯 보였던 상자 안의 하얀 케이스는 신곡의 앨범이었던 것 같다. 저건 또 언제 산 거야. 직접 와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택배를 보내서 사인을 요구하다니. 미친 거 아냐? 투덜대면서도 책상 위에 있던 펜을 가져와 슥슥 사인을 했다. 투명한 케이스에 담긴 CD의 얘기는 편지 어디에도 없어서, 궁금증이 일어 거실에 있는 오디오에 넣고 바로 재생시켰다. …노래? 신곡인가? 가사가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녀석으로써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세나 이즈미는 그 음색이 퍽 마음에 들었다. 곧 돌아온다고 했지. 곧이라니 언제야. 도저히 노래를 끌 마음이 들지 않아 계속 켜놓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침실로 새어들어 나오는 멜로디에 잠들 때도 그닥 쓸쓸하지는 않았다.
……세나, 세나!
시끄러워,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알아?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짜증이 팍 났다. 나갈 때도 제멋대로더니 돌아올 때도 똑같았다. 몸을 일으켜 세워 그 시끄러운 입을 막아버렸다. 어라? 하는 얼굴이 인상 깊었다. 그 후 잠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아, 역시 어디 아파? 하고 물어오는 꼴에 골이 아파왔다. 오자마자 또 무슨 헛소리람.
세나 답지 않네! 정말 아프기라도 한 거야? 해가 중천에 떴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개를 돌려 머리맡의 창문을 쳐다보니, 과연 한낮이었다. 휴일이라고 해서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들긴 했지만, 이 정도로 늦게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상태가 좋지 않기라도 한 건가? 딱히 그런 기미는 없었는데. 별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마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었다. 거실의 오디오는 이미 재생이 종료된 후였다. 일부러 끈 건가, 심술이 나서 다시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욕실에 들어가면서 세나──!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로 코웃음을 쳤다.
뭐야, 들으라고 준 거 아니었어? 빈정대니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눈치를 살살 보며 오디오 소리를 줄이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괜한 심술을 부렸다는 자각은 있어서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용케도 그걸 보았는지 환하게 웃으면서는 고마워! 역시 츤데레구나! 하는 건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팬에게 성심성의껏 대하는 건 연예인의 소임이니까. 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하지만.
그래서, 어딜 그렇게 갔다 온 거야?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벌써 3주가 조금 지나있었다. 여행지에서 보낸 엽서나 편지들의 주소는 모두 달랐으니, 꽤 많은 곳들을 다닌 모양이었다. 저런 방랑자 생활은 얼마를 준다고 해도 딱 질색이었다. 정말이지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
세계의 끝을 보고 왔어! 음… 아니, 지구는 둥그니까 끝이라고 하면 비약이지만─
정말이지 엉뚱한 소리만 계속 해댔다. 제대로 알아듣게 말해, 라고 말하기도 전에 현관 앞으로 달려가 캐리어를 뒤적대더니 사진 한 뭉텅이를 꺼내 왔다. 이즈미가 앉은 소파 옆자리에 털썩 앉아서 사진을 휙휙 넘기면서, 「이거다!」하고 사진을 건넸다. 네가 생각하는 세계의 끝은 바다구나. 수평선에 저물어가는 해가 걸려있는 사진. 폴라로이드로 찍은 건지 조금 크기가 작긴 하지만 과연, 이런 풍경이라면 가치가 있겠구나 싶었다. 예상치 않았던 수확은 언제나 기쁜 법이다. 이걸 보고 저 곡을 만들었던 걸까. 확실히 그에게는 가치 있는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도착했다는 문자 하나 안 남기다니, 언제나 그랬지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이것도 택배로 보내려고 했는데, 오는 도중에도 잔뜩 찍어버렸으니까, 역시 무리였어! 음? 문자? 휴대폰 잃어버렸어!
정말 가관이었다. 며칠 전에 걸려왔던 한 통의 전화가 생각났다. 그러니 당연히 연락이 안 될 수밖에. 참, 그러고 보니 연락을 해달라고 했었지. 짧게 문자를 보내고서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옆에서 츠키나가 레오가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기어 와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마를 꾹꾹 눌러 밀어냈지만 저도 여독으로 꽤 지치긴 한 모양인지 조금만, 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다. 사람을 그렇게 얼빠지게 만들어 놓고 튀어나간 걸 생각하면 아직도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이러한 작태에 화를 내도 되는 건지, 사귀는 데에다 같이 살고 있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뻔뻔한 태도를 보면 원래 이런 녀석이니까─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부터 뭔가 글러먹었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서, 다른 할 말은 없어? 물어봐도 음? 하더니 …다음에는 같이 가자! 같은 대사나 읊어놓았다. 이 속없는 놈.
이대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주말이라고 나태해지는 것도 성미에 맞진 않았으니 아침이라고 하기엔 미묘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돕겠다고 옆에서 얼쩡대는 것을 방해된다고 저 멀리 쫓아버렸다. 얌전히 식탁 앞에 앉아서 또 종이에다가 무언가를 끄적이는─아마도 작곡이겠지만─레오의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다 계란 프라이를 보고 아,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한번 쳐다보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노른자만 쏙 빼서 집어가는 모습이 당연하다 싶을 만치 익숙했다. 역시 노른자는 녀석의 몫이었다.
…뭐, 계획만 제대로 짠다면 같이 가 줄 수도 있어. 이번처럼 무작정 가는 건 절대 사양이지만?
휴가를 받는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하긴 생각해 보면 함께 여행을 간 적도 별로 없다 싶었다. 졸업 후에는 정식으로 데뷔를 하고 꽤 바빠졌으니까 그럴 시간도 없었고. 신곡이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분주한 이런 시기에는 무리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식사를 하다 말고 정면을 보니 정말 의외였다는 듯 눈을 빛내는 모습에 그렇게 이상한 발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 세나─! 식탁 위에서 난동을 부리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여권이 어디 있더라, 기억을 떠올리면서 마저 식사를 했다. 정말이지 여유롭기 짝이 없는 휴일이었다.
카오루는 앞으로 뭘 할 거야? 얼마 전, 데이트 중이던 여자아이가 물었다. 응? 하고 되물었지만 그러니까, 하고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글쎄, 뭘 하지. 어차피 매일 똑같은 일상이고, 학원에 출근 도장은 찍어야 하겠지만…. 너와 데이트라던가? 그는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그렇게 썩 맘에 드는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뭐가 문제지, 진땀을 흘리며 애써 웃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얼마 있으면 죽을지도 모르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요즘 TV나 인터넷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종말론 같은 이야기. 예전부터 들어왔던 것들보단 꽤 신빙성이 있긴 했지만. 언론에서 계속이고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면 조금 진짜 같기도 했다. 그래도, 별로 진짜라는 생각은 안 든단 말이지. 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하카제 카오루가 그 허무맹랑한 얘기가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건, 점점 어딘가로 떠나거나 집에 틀어박히거나 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였다. 집에는 그렇게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침묵 탓일까, 몹시나도 불편했다. 이대로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라, 카오루. 좋은 아침이네요?
평소보다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한 교정에서, 분수대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반이나 부실에도 아무도 없어서 조금 빙 돌아서 일부러 분수대 앞을 지나쳤는데 먼저 말을 걸어오니 꽤 안심한 모양이었는지 카오루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구나. 다른 사람들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사쿠마 씨를 포함해서 「삼기인」은 신출귀몰하니까.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했지. 일부러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변명거리를 만들어 댔다.
아침은 꽤 지났잖아? 이제 오후라고 해야 하나, 점심시간도 지났으니까.
그런가요?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속에서 헤엄치던 소년이 분수대 밖으로 팔을 뻗었다. 마치 잡아달라고 하는 듯 손을 내미는 듯한 모습에 카오루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생각보다 따뜻하다. 셔츠의 소매 끝부분이 젖어버린 듯 축축한 느낌이 들었지만,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물의 감각에 눈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카오루. 그런데 무슨 일 인가요?
주말에 학원에 나오다니, 별일이네요. 물에 젖은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뭐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만날 사람도… 여기까지 와버린 자신이 내뱉어도 괜찮은 말인가. 계속 대꾸하려다가 아까 변명의 연장선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그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주말에 등교라니, 그것도 분수대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사실 조금은 예상했지만 말야.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다. …쓸데없는 말이었을까?
그 말대로 주말에 학원에 와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모르겠는걸. 대충 반문으로 얼버무린 카오루였지만 소년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려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소년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부실, 이에요. 해양생물부의.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게 있거든요. …같이, 갈 건가요?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먼저 갈 거라고 생각했어? 이어지는 카오루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하니까요. 교복에서 묵직하게 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오루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바닥에 하나둘 생기는 점들을 따라갔다.
텅 비었네…. 언제 이렇게 정리했을까, 부실 안은 여느 때처럼 어두웠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언제나 푸른 빛을 내고 있던 어항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아, 어쩐지 정말 오래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웃고 떠들던 그때부터 수천 수만의 해가 흘러 미래로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고작 며칠 발걸음을 하지 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청소는 주로 소마 군이 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이렇게 빨리 변하는구나. 선반 위를 손으로 쓱 쓸었다. 먼지가 일어 콜록대는 소리가 부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감기, 인가요?
소년은 걱정스런 얼굴로 돌아보며 카오루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은 없는데…. 이상하네요. 중얼대는 소리가 신경쓰여 그 팔을 잡아 내렸다. 그냥 먼지를 마신 것뿐이야. 대답하니 그런가요, 하고 다시 무언가를 뒤적이기 시작할 뿐이었다.
뭘 찾는 거야? 놔두고 온 물건을 정리하는 것치고는 꽤 오래 걸리는데.
아. 어항을, 잠깐.
아직 돌려보내주지 못한 아이가 있어서요. 크기에 맞는 어항을 찾아야 할 텐데, 너무 큰 것들뿐이라서. 곤란하네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먼지 구덩이를 파헤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뭐한데.
도와줄까?
괜찮은가요? 따라와 주기까지 했는데.
뭐어, 이대로는 할 일도 없고 말이지? 어느 정도면 되는 거야?
이 정도, 일까요…? 자신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듯 불확실한 답을 내놓는 소년을 보며 카오루는 하아,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별로 달라진 게 없네. 아마, 앞으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저 자신의 바람일 뿐이라고 해도, 항상 똑같은 곳. 똑같은 말투. 똑같은 행동…. 아, 답지 않게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신호였다.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카오루는 소년의 반대편, 반쯤 열려 있는 선반을 열었다. 정리를 별로 하지 않은 듯 널브러져 있는 플라스틱 어항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되려나, 음. 이정도…. 눈대중으로 비교해가며 두어개를 추렸다. 남은 것들은 차곡차곡 포개어 다시 선반 안에 넣어두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아, 고마워요. …으음, 일단 옮겨 볼까요? 소년은 자신의 앞에 벌려져 있는 수조들을 정리한 후에 카오루가 건내준 플라스틱 어항을 받아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저거랑 이거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불이 꺼져서 모르고 있었는데, 부실 안에 있는 큰 수조에는 해파리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수조에 담긴 물을 붓고, 양손으로 한마리 한마리를 담아 옮기는 모습에 저러다 쏘이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도 들었지만, 본인은 정말이지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뭐 쏘일 것 같았으면 저렇게 대담한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읏차, 하고 수조를 들어올리자 흔들리는 수면과 함께 해파리들이 촉수를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옮겨진 거처에 불안해 하고 있는걸까, 소년은 나지막이 괜찮답니다, 바다로 돌아가는거예요. 하고 어항에 계속 속삭일 뿐이었다.
…갈까요?
그 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를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끌어안고서는. 팔이 아파오면, 그때는 다시… 도와달라고 말할테니, 들어주실래요?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부실의 문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먼지가 가득한 선반 안을 정리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리는 역시나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자꾸 두리번거리게 됐다. 상점가에 이렇게 사람이 적은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쩐지 귀에 거슬리는 바람소리였다. 건물 사이를, 잔잔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도, 그렇다고 거센 돌풍의 소리도 아닌 바닥을 쓸고 가는 아무것도 없는 느낌의 소리. 이상하다, 이제 막 여름이 지나갈 무렵인데 이렇게 쌀쌀하다니.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어째선지 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서, 마치 겨울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정말 마지막 날에는 눈이라도 펑펑 내려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건 아닐까. 뭐, 이제 고작 가을이지만.
그거 들어줄까? 이제 슬슬 무거울 것 같은데.
아…. 그럼, 부탁할게요.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부탁드려요…? 그 말대로 조심조심, 행여나 떨어뜨려 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요한 수면을 흔들지 않도록. 신경을 쓰느라 걸음이 느려져서, 소년은 카오루의 보폭에 맞춰 한발한발 내딛는다. 거리에, 적어도 그들의 귓가에 울리는 터벅터벅 소리는 겹쳐져 한 사람이 묵직한 발소리를 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걸 의식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괜히 신경 쓰여 옆을 쳐다보게 된다.
카오루?
소년은 시선이 느껴졌는지 정면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카오루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애써 다시 앞을 봤지만, 역시 신경 쓰였다.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더이상 모른 체 하고 있을 수가 없어 왜 그래? 하고 물으니 이번에는 소년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한다. 어쩐지 갈증이 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역시 열린 가게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거의 다 왔어요. 소년이 저 멀리를 가리켰다. 도보로 걸어가기에는 약간 먼 듯 멀지 않은 듯 애매한 거리였다. 몇번 와본적이 있었지. 피서라던가, 라이브라던가. 이렇게 누군가와 단 둘이 오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사람 없는 해수욕장으로 발을 내딛자 사박사박 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혼자서 바다에 온 것도 오래됐다 싶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뺨을 건드리는 느낌이 좋았다. 아무도 없어 황량한 도심과는 다른 바람이었다. 마치 겨울바다 같았다. 버석버석하고, 어둡고. 춥고 싸늘하지만 그래도 이 느낌이 좋았다.
꽤 오랫동안 들고 있었으니, 팔도 아파오기 시작해 백사장 위에 수조를 올려두었다. 조금 물이 넘쳐 하얀 모래가 방울방울젖어들어갔다. 그걸 잠시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소년이, 언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인기척 없이 다가와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고민이라도 있나요?
그런 표정을 하고 있길래요. 짧게 덧붙이는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계속 이런 느낌이다. 답해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일을 물어봤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어떤 말을 했었더라, 실없는 농담을 해도 받아주었던가. 이제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카오루가 없었다면 중간에 놓쳐 버리고 말았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거고.
아뇨, 와주어서 다행이에요.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카오루는 의미 모를 소년의 말에 픽 웃었다. 알 듯 말 듯 한 기분이었다. 네가 그 분수대에 있어 주어 안심한 마음과 비슷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멋쩍어 괜히 주위의 풍경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정말이지 아무도 없구나. 두어시간 후에는 비가 쏟아질 것 마냥 하늘에 구름이 한점 두점 끼기 시작했다. 바다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요, 카오루와 단 둘이서 바다에 와보고 싶었답니다. 오래 전 부터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뒤일까, 그러니까. 카오루가 분수대로 저를 찾아와 주었을 때 부터일지도 모르겠어요. 꽤 오래 전 일인가요? 바로 얼마 전 같은데. 작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그 나른한 말투에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았다. 아아. 나는 어쩌면 이 목소리를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는 조금 더,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귓가에 울리는 바다의 소라고둥의 숨 같은 소리. 언제부터 마주하고 있었는지 모를 이 시선도.
조금 있으면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서둘러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소년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한 채로 해안가에 남겨두었던 네모난 어항을 들고 바다로 향했다. 손이 모래투성이가 되어있는 것 쯤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더러운 것들은 모두 바다에 씻겨갈 테니까. 카오루는 일어나 그 등을 쫓았다.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가 까끌거렸다. 이윽고 파도가 치고, 비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멈춰, 가지 마. 터져나오려던 말은 서두르듯이 내리기 시작한 굵은 빗줄기 소리에 덮여버렸다. 소년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하늘에서는 햇빛이 비추었다. 소년의 걸음에 맞춰, 카오루는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발 끝, 그리고 다리. 허리,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밖은 빗소리로 이렇게나 시끄러운데 바다 안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언젠가 잠수했던 풀장의 물 속처럼, 수면은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 마치 물 속에서도 호흡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담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커다란 거품이 생겨 물속으로 녹아내려갔다. 손 끝에 무언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따뜻한 것도 같았다. 분수대에 잠겨 있던 소년을 꺼내줄 때와 같은 감촉이었다.
이 손을 알고 있다. 까만 바다 속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간신히 눈을 비집어 열었다.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 따끔따끔했다. 물속인데도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액체가 눈가에 방울방울 흘렀다. 억지로 눈을 뜬 탓일지도 모른다. 손에 들린 플라스틱 수조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몇 마리의 해파리가 기쁜 듯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시선 끝에는 바다를 닮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있다. 마치 인공호흡을 하듯, 찰나의 순간에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침전하고 있다. 모든 가라앉는 것들은 아름답다. 어쩐지 좋은 꿈을 꾸라는, 그런 바닷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샘플 (1차 창작)
2024년 1월 23일, 화요일 오후.
소년 A는 중얼거렸다. 춥다. 진짜 춥다. 보일러가 고장났는지 바닥에서 차가운 냉기가 새어나와 안 그래도 낮은 체온을 더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집에서 저체온증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년 전에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택배상자를 꺼내 안에 들어있던 에어캡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았다. 뽁뽁 하며 에어캡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은 여기저기가 해져 추위를 막을 용도로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에어캡을 몸에 두르고 이불을 바닥에 까는 것이 난방이 더 잘 될 것 같았지만 이불은 바닥의 냉기를 막아주기에는 턱없이 얇았고, 에어캡으로 몸을 둘러싸기에는 그 길이가 너무 짧았다. 그리고 비단 보일러를 고장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사람들은 벌써 땅 밑으로 들어가 지상에는 거지나 노숙자들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이번 겨울의 추위 때문에 고장나 있던 보일러를 큰맘먹고 한달 전에 고쳤는데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것은 A에게는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뭐, 곧 죽을테니 별로 인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몇 달 전 부터 2012년의 마야의 예언처럼 어떤 멸망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한 연구소에서 젊은 천재 연구원이 한 논문과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의 멸망설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며, 그것을 뒷받침한 무언가와 함께. 논문의 내용은 큰 가능성이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급속해져만 가는 지구온난화와 소수의 사람에게 발병해 퍼져나가는 생명에는 위협이 가지 않지만 인간의 생식능력을 죽이는 알 수 없는 괴질로 인한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정부는 아직 이 괴질에 대한 아무 근거도 찾지 못했고, 사람들은 지구 멸망에 대한 가능성을 높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자꾸 등장함에 따라 정부를 불신하고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계 정부에서 어떤 발표를 한 것이다.
[지구를 향해 커다란 소행성이 다가오고 있다. 십여년 전 부터 관측되었던 이 소행성은 지구에 충돌할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부는 이로 인한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이 소행성이 관측된 날 부터 지하에 커다란 방공호를 만들고 있다. 이 방공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 될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또는 이게 무슨 일이냐, 를 외치며 다가올 종말에 대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는 뉴스가 A의 귀에도 몇 번 들어왔다. 만들어질 지하 방공호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계 정부에 따르면 지하 방공호는 '거의 대부분의' 인류를 수용할 수 있고, 소행성으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에서 다시 정착하기 위한 종자들을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거의 대부분이라는 말에서 눈치챘겠지만 전 인류가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썩어빠진 정치인놈들은 이 방공호에 들어가는데에도 약간의 돈을 지불하게 만들었다. 물론 일반인들이 지불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목숨을 살리는데 그깟 돈이 아까울 리도 없지만, 과한 금액을 요구했다가는 폭동이 날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일반인들의 기준은 쉽게 따지자면 일정한 직업이나 돈벌이가 있어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 가끔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자며 돈을 모으는 단체가 있긴 했지만 그 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사람 중 누가 방공호에 들어가는가로 다툼이 일어나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대립과 갈등, 이윽고 살인까지 일어나게 되자 돈을 모금하자며 가장 먼저 앞섰던 한 시민은 그 값을 지불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던 후로 어떤 나라에서도 다시는 모금함을 열자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질 않았고, 세계는 말 없는 경계에 빠져 서로를 외면하게 되었다. 이윽고 세계 멸망의 날이 가까워지는 시기가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을 지불하고 방공호 안에 들어가 덜덜 떨고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인류 대부분이 사라져버린 지구의 위쪽에서 무법지대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A 역시 그렇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2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된 A는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밤낮 없이 일을 하지 않으면 입에 거미줄을 치게 될 상황에 놓였다. 그의 어렸을 적 부터 절친했던 친구는 차라리 자신의 집에 들어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A는 그 말을 거절했다.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사양하고 보는 A였다. 현재 이 지구 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일 것이다. 매우 가난하지 않다면 사서 죽고 싶어하는 복에 겨운 사람들 일 것이 분명했다. A는 사람을 살리는 데에도 돈을 받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욕했지만 내일의 죽음보다 당장의 추위를 막기에 급급했기에 집을 홀랑 태워먹고서라도 집 안에 라이터로 불이라도 떼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었다. 내일이 당장 운석이 떨어지는 날인데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 하고 잠시 생각하던 A는, 방바닥에서 일어나 에어캡을 망토처럼 두르고서는 위에 겉옷을 하나 더 껴입고 집을 나섰다.
역시나 거리에는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간혹 저 먼 곳에서 술을 입에 쏟아붓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아주 가끔이었다. A는 곧바로 병원 옆에 있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누군가가 난동을 부렸는지 문은 잠겨 있었지만 유리가 거의 박살이 나 있었다. 주먹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아래로 무너져 내릴것만 같은 두꺼운 유리문에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맹이를 던졌다. 역시나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났다. 안은 어두웠지만 그나마 햇빛이 직선으로 들어와 글자들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몇분을 그렇게 뒤지다 보니 수면제인지 수면유도제인지 모를 무언가가 나왔다. 그걸 그대로 들고 나오려던 A는 약국 안쪽에 위치한 전화기를 보고 자신의 친구, B를 떠올렸다. 아침에 전화를 했더니 받지를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했지만 A는 금방 깨달았다. 어차피 B는 자신과는 다르게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지금쯤은 어련히 방공호 안에 들어가 있겠지. 그래도 A 자신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부인사도 없이 이렇게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종말과는 별개로 어딘가 조금 먹먹해짐을 느꼈다. 네가 안부인사를 안하고 가겠다면 이쪽에서라도 해야겠다. A는 그렇게 생각하며 멋대로 수화기를 들었다.
"야. 너, 잘 피하긴 한거지? 전화 안받는걸 보니까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나 내일이면 죽는다. 평생친구라고 했으면 안부정도는 남기고 가지 그랬냐? …그럼 잘 있어라."
음성 메세지를 남기고서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진 A는 기껏 찾아낸 수면 유도제를 들고 다시금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이 그대로 열린 편의점에 들려서 생수 한 병을 가져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입에 알약을 한가득 담아 목구멍 뒤로 넘기고는 다시 차디찬 바닥 위에 누웠다. 평소에도 잠을 잘 자는 체질이었는데 이번에는 먹자마자 스르르 눈이 감겨오는 것 같기도 했다. 깨어나자마자 죽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마음의 준비는 해두자고 생각하며 A는 눈을 감았다.
2024년 1월 24일, 수요일 밤.
A가 눈을 떴을 때는 한 밤 중이었다. A가 보기에는 이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으며,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허름한 판잣집 그대로였다. 아직 운석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니 A는 아마도 자신이 세네시간 정도 밖에 자지 못한 건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석에 깔린 채로 깨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A는 투덜대며 방바닥에서 일어났다. 운석이 떨어져도 이 곳에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으나 결국에는 식량난과 그 이외의 일들로 죽을텐데, A는 굶어 죽는 것 만은 절대로 싫었다. 그렇다고 목을 매달아 죽는다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 괴롭게 죽고싶지 않다는 이도저도 아닌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ㅡ그냥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고 말하는게 옳은ㅡA이기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 의사들이 있었다면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고 비는 야매 환자들이 대량으로 생겨났을 텐데, 참 안타까웠다. 물론 A도 그 무리 중의 한 명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편하게 죽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때에, 집의 현관문이 기이하게 삐걱거렸다.
"……?"
A는 재빨리 문쪽으로 다가가 힘껏 문의 안쪽을 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밖에 있었고, 이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상이 망하려니까 미친놈들이 사람이라도 죽이고 다니냐고, 아주 진저리가 났다. 이 집에는 훔칠것도 도둑질할 것도 없는데 갑자기 웬 강도질이냐, A는 필사적으로 문을 막았으나 어쩐지 문 밖에서는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A는 힘을 조금 빼고 얇은 나무문에 귀를 댔다. 아직도 있는건가? 귀를 기울이자 문 반대쪽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저 다리에 힘이 쫙 풀린 A는 문을 막은 채로 주저앉아버렸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거지, A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A, 나야."
"……B?"
A의 체감상으로는 단 몇 시간 전에 안부 전화를 남겼던 그의 친구 B였다. A는 언뜻 봐도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듯 했다. 앉은 채로 문을 열어주기는 했는데 얼굴을 보니까 더 의문이 생겼다. 분명히 방공호에 들어가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안에 들어갈 돈이 없는 집안도 아니고. 뭐가 어찌됬든 일단 A는 B를 집에 들어오게 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방공호 안에 들어가려는데 부모님이 보이질 않으셨어. 아직 밖에 계신가 싶어 나와 있었는데 너에게서 메세지가 왔지."
"그래서?"
"그래서 왔어."
A는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건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 녀석,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라도 하자는 건가? 고작 그깟 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안부인사 하나 못한 것 때문에. 평소에 하던 짓들을 보면 정말 없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얘기가 여기서까지 통용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했다. B는 살아있어야 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그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연했다. 이래서야, 안부 전화를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는 생각에 A는 아직 약에 취해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돌아가. 안부라면 이제 전했으니까 빨리 돌아가."
"늦었어, 이게 더는 못 돌아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A가 복장이 터지겠다는 듯이 B를 노려보았다. 평소에는 여우같은 놈이 왜 이럴 때만 되면 멍청해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온거야, 대체….
"날짜를 봐. 오늘이 사람들이 말하던 멸망의 날이야."
A는 그제서야 자신이 꼬박 하루를 넘게 잠을 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넘겨두고, 오늘이 당일인 이상 방공호의 문은 굳세게 잠겨 있을 것이 뻔했다. 이제 방법이 없는건가? 죽어도 살리고 싶었던 녀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건가? 음성 메세지 하나 듣고 달려왔다는 말에 조금 감동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 목숨은 막 버리는 게 아니라고 화가 났다. B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랑 같이 죽으려고 왔어?"
"……."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A는 허무한 얼굴을 했다. B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A의 앞에 앉았다.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가는 정적이 감돌았다.
"시계를 봐."
B는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A에게 보여주었다. 시곗바늘은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A는 B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목시계와 B의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왜 이런 걸 보여주는데? 라고 묻는 A에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별다른 대답은 없이, B는 계속 시계를 쳐다보라는 눈치만 주었다. 그렇게 5분 가량이 지났다.
"이걸 봐."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아무 일도 없잖아."
"그래. 아무 일도 없어. …그 날이 지났어.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멸망의 날은 이미 끝나 있었다.
2024년 1월 25일, 목요일 새벽.
그제서야 A는 B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앞에 놓인 탁상에 고개를 박았다. 그러고는 무어라 우물우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재촉하는 B의 목소리를 들으며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제 안 죽었으면 오늘 죽을 지도 모르잖아."
"그건 아냐, A."
B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A는 B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B는 그런 A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속삭였다.
"이번 일은 세계의 모든 과학자가 우주를 관측해 알아낸 예언이었지."
"지금 죽는다고 쐐기 박는 거야?"
"아니. 이것이 빗나갔다는건, 우리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A는 믿지 못하겠다는것인지, 무언가 석연찮은듯한 얼굴을 했다. 뭐, 상상하는 건 자유지만. B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A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것 같다는 한탄을 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죽어있을지도 모르잖아?"
일단 자고 내일, 그러니까 오늘 아침이나 오후에 얘기하자고 말하려던 A는 자신이 하루가 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피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적 피로가 쌓여도 몸이 거부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A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B는 현관문을 열어 집 안으로 찬바람을 가득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밤하늘이 참 예뻐." 같은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니 A는 답답하기가 그지없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니 참 본받고 싶은 마음 본새였다. 게다가 상당히 추웠다. 조금만 더 가만히 있으려니 바깥의 공기와 집 안의 공기의 온도가 똑같아졌다. 잠도 오지 않는 이대로는 집에 있어도 어쩔 방도가 없겠다 싶어 B가 문을 열고 나간 문을 나오면서 닫아버리는 A였다.
"그래, 그 예쁘다는 밤하늘 한번 구경해 보자."
이런 도심 한 가운데서 무슨 밤하늘 구경인가. 물론 불빛에 눈이 부시던 며칠 전 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해도 요즈음에는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별무리를 이런 매연 자욱한 도시에서 볼 수 있을 리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의외로 밤하늘은 여태 본 적 없는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정말 예쁘기는 예뻤다. 이만큼의 별을 실제로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했다. A는 그 중에서도 가장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지의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신기해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가 조금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고서는 자신의 얇은 옷을 바라보았다.
"추워?"
그걸 꼭 말해야 아냐고 대꾸하며 A는 혼자 팔짱을 꼈다. 밤바람이 어지간히도 싸늘했다. 하늘이 맑게 개인 대신 바람은 날카로워서, 바람이 너무 세서 매연들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A에게 심어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만큼 추웠다.
A는 어깨에 닿는 감촉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지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B의 외투를 받으면 역으로 B가 추워지는게 아닌가. 벗어서 돌려주려고 했지만 B는 자신은 지금 별로 춥지 않으니 일단 입고 있어달라, 는 말로 A에게 다시금 쐐기를 박는 듯 했다. 제대로 고쳐입은 외투는 소매 끝이 손바닥의 반만큼은 더 길었다.
A와 B가 나온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약국에 갔었을 때와 같은 오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에 아직도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계속 걷다 보니 "난 살아있다고!" 하면서 소리치는 사람들이나, 술에 절은 채로 길바닥에 널부러진 아저씨들이 몇 보이기도 했다.
"허 참."
"왜?"
"웃기잖아."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자기 위안인 건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건지는 몰라도 A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조금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좀 더 걸을까."
B가 그런 A를 보며 웃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배는 더 즐거워 보이는 B를 보며 A는 너 뭔가 수상하다는 둥 농담을 했다. 그러자 B는 자신이 그렇게 즐거워 보였냐며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A는 머쓱거리며 장난이라고 되받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듯 했다.
그렇게 밤을 걷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아침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잠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는지 A가 하품을 했다.
"졸리면 조금만 자러 갈까?"
B는 고개를 끄덕거린 A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집 안에는 약간의 먹을 것과 생필품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이외에는 대부분 A의 집보다는 몇십배는 더 좋은 집이었다. 물론 수도와 가스 역시 들어오지 않았지만 A는 더 나아진 환경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씻고 싶었는데."
"욕실에 물 받아 놨어."
뭐? 수도 끊기지 않았어? A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B는 지하실에 있는 큰 수조에서 물을 가져온 것이라 말했다. 대체 왜 지하실에 큰 수조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꽤나 좋은 일인 듯 싶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따뜻한 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씻는 데 문제는 없을거야. 지하실에 있는 물도 아직 충분하고."
"…그러니까, 대체 그 물들이 왜 지하실에 있는 거냐고."
A는 그 말을 끝으로 B의 옷장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욕실로 달려갔다. 그 뒤를 지켜보고 있던 B는 먼저 침실에 가 있으려는 듯 2층 계단을 올라갔다.
2024년 1월 25일, 목요일 오후.
깨어나 보니 A의 옆에서 B가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바닥에 누운 것은 A 자신 뿐이었는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침대 위에서 자다가 굴러 떨어진 걸까, 이녀석이 이런 잠버릇이 있었나? 싶었지만 기억을 되짚어 봐도 죽은 듯이 자고 있는 B의 얼굴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정말로 숨이라도 멎은 줄 알고 재빨리 흔들어 깨웠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배가 고파진 A는 1층의 주방으로 내려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냉정고에서 우유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상하진 않았겠지, 하며 다시 B가 잠들어 있을 침실로 가져오자 어느새 B는 잠에서 깨어 있었다.
"상한 거 아니지?"
"지금 겨울이니까 괜찮아. 게다가 너네 집 냉장고면서 무슨…."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머리를 정리하는 B에게 잔에 우유를 따라 건넨 A는 멋대로 B의 옷장을 뒤져 두꺼운 겉옷을 꺼내입었다. 대충 정리를 한 후에 밖에 나왔으나 상황은 몇 시간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아직도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방공호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도 나올 기미가 보리지 않았다. A는 이렇게 돌아다녀 봤자 별 방도가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한 곳에 계속 쳐박혀 있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을 따라 걸어간 곳은 시청 앞이었다. 광장 앞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있었다. 어쩐지 사람은 보이지도 않더니 다들 이 곳에 모여있었던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들어가 보니 사람들은 B와 같이 어제 죽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살 가능성이 있다면서 향후의 대책을 논하는 듯 했다. 아무 일이 없다면 방공호 속의 사람들도 곧 나타나리라고 생각했지만 만약을 위해, 라고 하는 듯 했다.
"재밌겠다. 가서 얘기나 좀 들어볼까?"
"뭐? B, 잠깐…."
B가 A의 손목을 잡아 군중들 사이로 이끌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사람들의 한 가운데 쯤에 위치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속이 거북해진 A는어쩐지 심기가 뒤틀려 있었다.
"어차피 다 죽을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서 뭐하냐고."
불퉁거리며 작게 뱉어냈던 그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갑자기 광장이 가라앉았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모두 A를 쏘아보았다. 말 없이 A를 바라만 보는 군중들의 모습에 A는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피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번에는 A가 B의 손목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B가 A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고개를 내려 A의 귀에 속삭였다.
"A, 그런 말 하지마.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을거야. 날 믿어."
…대체 너의 어딜 보고 믿으라는 거야, A가 한숨을 내쉬자 군중들은 다시금 북적대는 소리를 내었다. A를 향한 적의 담긴 시선도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A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정말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믿음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만약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A는 미련 없이 광장을 떠나려고 등을 돌렸다.
"왜 그래?"
"응? 내가 뭘?"
"너 방금 내 옷 잡아당겼… …아무것도 아냐. 그냥 기분탓이었나봐."
요즘들어 너무 예민해졌나봐. A가 약간 시무룩해져 풀이 죽은 모습을 하자 B는 귀엽다며 그런 A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A 자신은 키가 작은 편도 아닌데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크다고 가끔 이렇게 머리를 만져오는 B에게 그만 좀 하라며 투박을 주었으나 듣는 적이 없었다. B가 "그럼 갈까." 하며 A의 손을 잡아왔다. 먼저 가자고 재촉한 것은 자신인데 무언가 석연치 않았았다. 조금 더 걸으니 B가 자신의 집에 돌아가 오토바이 한 대를 가져왔다.
"뒤에 타."
"너도 참……."
이런 상황에서 오토바이 타고 놀러나 가자니, 정말 지금 상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덩달아 저조했던 기분이 좋아진 A는 B의 뒤에 단번에 올라탔다. A가 사고 나면 치료해줄 의사도 없다고 운전 잘 하라며 웃음 섞인 경고를 던지자 B도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갈까?"
"그냥 지구 멸망할 때 까지 달리던지?"
"그럴만한 연료는 없다고!"
오토바이가 움직이면서 내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A는 문득 생각했다. 세상이 끝나기 전에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2024년 2월 1일, 목요일 오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있을 때 아무도 없는 대형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싸그리 쓸어온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A는 생각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한 곳에 식량을 놔두자 겨울의 온도 탓인지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것 이외에는 모든것이 다 괜찮았다. 뭐,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긴 했지만. 왜 사람들이 아직까지 보이질 않는 걸까? 만약 멸망한다고 떠들어댔던 일들이 거짓이라면 충분히 쪽팔리고 부끄러워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평생 지하에서 썩을리가 있나. 아니면 조금만 더 있으면 정말로 지구가 멸망하는 건가? A의 질문에 B는 "글쎄, 잘 모르겠는걸." 하는 한마디로 답했다.
사실 모두가 지하 방공호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문을 열 수 없었을 뿐. 방공호는 바로 시청 광장 아래에 있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어가야 하니까 전국적으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뭐가 어찌됬든 문을 두드리고 뭘 해봐도 대답은 없었고, 게다가 문은 튼튼하기가 탱크로 밀고 가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B, 사람들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
"…뭐, 때가 되면 나오지 않을까."
뜸을 들이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나온 답이 저모양 저꼴이다. 정말 물어본 가치도 없는 대답이었다. 몇 분 가량 생각한 결과가 저거라니 머리좋은 B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다가 시청 앞을 지났다. 모여있는 사람들도 자신들 같은 생각을 하는건지 뭔가 불안해 하는 눈치였다. 일주일 동안이나 시청 앞에 있었는지 시간을 정해서 모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볼 때 마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참 한가해 보였다. 무어가 그리 지루한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A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B가 그 앞을 막아섰지만 A는 눈치없게도 남자의 용건이 궁금하다는 듯이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하며 싸가지 없는 티를 냈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 문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돌계단에 앉은 A의 옆에 남자가 털썩 주저앉자 B의 얼굴이 더 사나워 진 것은 두번 말할 것도 없었다.
"모여봤자 아무 대책도 안 나오면서 왜 이러고 있는지 한심하냐."
"어… 음… 네."
말을 고르다가 낸 결론이 저거였다. 이녀석 말본새좀 봐라, 남자가 푸핫 하고 웃었다. 남자는 A가 첫날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이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지만 훈계나 적대감이라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접근인 듯 싶었다.
"아직도 우리가 개죽음 당할 거라고 생각하냐?"
"그거야 모르죠… 확률은 반반이잖아요."
죽느냐 사느냐의 1/2라고 말하는 A는 참 단순했다. 그래도 저번 보다는 살 확률이 더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이 맑아도 너무 맑았다. 구름이 우중충하게 끼어 비가 후두둑 쏟아져 내리고 천둥번개가 몰아쳤다면야 약간의 두려움이라도 품고 이불을 뒤덮어쓰고는 귀를 막아 방에 틀어박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이 다음에 입을 연 것은 방금 대화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던 B였다.
"A, 너는 죽지 않을거야."
돌아보았지만 단호한 말과 달리 꽤나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한 말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본인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에 A가 무엇에 어긋남을 느꼈는지 생각했다. 뭐가 어찌 됬든 달콤한 B의 얼굴을 앞에서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어린것이 육갑을 떤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까의 적대적인 눈빛과 지금 표정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쟤 왜 저러냐?"
"B요? B가 왜요?"
작은 질문에 큰 대답을 하면서 세상은 망해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염세주의자 주제에 제법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던 A는 방금 전의 남자와의 대화를 기점으로 왠지 모르게 아주 약간이지만 시청 앞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받지 않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그 무리 중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얼굴만 보면 노려보는 것에서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정도였지만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24년 2월 8일, 목요일 저녁.
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허송세월만 잔뜩 보내고 있는 느낌에 원래 없던 의욕이 더 꺾였다. 전기고 가스고 들어오질 않으니 요리를 할 때는 라이터로 불을 피워 마당에서 화려한 불꽃 파티를 해야만 했다. 물은 그래도 나름 넉넉한 것 같지만, 어디서 솟아나오는지 전혀 줄지 않는 느낌이다. 대체 그 많은 물이 왜 자택에 있는 걸까. 뭐가 어쨌든 A는 그런 것 보다 눈 앞에 있는 고기 한 점이 더 소중하기는 했다. B의 집 마당은 꽤 넓었다. 캠프 준비물 같은 것 들도 찾으면 계속 나와서 어쩐지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저기 말야, A."
"왜? 아, 거기 타기 일보 직전인데."
"내가 만약에 네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일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맛있는 고기 먹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A의 눈이 게슴츠레 B를 노려봤다. 가끔 뜻 모를 소리를 하는게 흠이다 싶었다.
"좋아하지 않을 일이면, 나한테 해가 된다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는데… 조금 미묘해."
B는 말을 하면서 상추 쌈을 싸 A의 입에 넣어주었다. 얘 또 무슨 일 저지른 거 아냐? 하지만 딱히 짐작가는 일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을 일이라… A 자신은 먹을 것에 약한 인종이고 하니 의식주만 건드리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게 해 준다면 뭘 해도 상관 없었다.
"하긴 내가 나한테 해가 될 일을 할리가 없지만."
"아까는 미묘하다며?"
"뭘 줬으면 줬지 뺏겠어?"
일단 뺏어갈 게 있기나 하냐, A가 웃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중에서는 B가 제일 소중했고 그나마 다른 놈들과는 연락도 거의 안하는 사이인데다가, 집에는 훔쳐갈 것도 없었다. 정말 주고싶어도 줄 게 없고, 뺏고싶어도 뺏어갈 게 없는 노릇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 웃긴 노릇이었다.
A는 B에게 불판에 고기나 더 올리라며 면박을 주었다. 평소에도 멀쩡한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지구가 멸망하고 어쩌고 하는 일이 일어난 후 부터는 녀석이 더 이상해진 느낌이었다. 하긴 이 상황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더 이상한가,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최근의 B의 웃는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 나빴다. 얼굴도 반반한 놈이 순진하게 웃는게 가끔 그렇게 무서울 때가 있다.
뜬금없는 B의 말에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져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을 찾으러 방공호에서 나왔다면서 A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는 부모님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다. 더분 다 어련히 방공호에 들어가셨겠구나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님이 방공호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너 부모님 걱정은 안 돼?"
"당연히 걱정되지."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는게 어떤가, 전혀 걱정따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그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기기도 했다. B의 부모님은 A에게도 친절하신 분들이었다. 일 때문에 바쁘실 때가 많아 몇 번 뵌 적은 없지만 아들처럼 대해주시는 데에는 조금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B의 표정을 보니 어쩌면 B보다 A가 그의 부모님을 더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자꾸 대화 주제가 무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분 탓인가?
"지금은 눈 앞에 있는 네가 더 걱정돼."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더 걱정하는게 우선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놈을 아들이라고 낳아 놓으신 B의 부모님께 방금 전 B가 한 행동을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드리고 싶었다. 휴대전화가 망가져서 녹음을 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 될 듯한 A였다.고기를 다 먹은 후에는 대강 뒷정리를 하고 B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A는 거의 잘 시간이 되어 대충 씻고 B의 방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보통 잘 때는 침대 위에는 B, 바닥에는 A가 누워 자고는 하는데 최근에는 자꾸 B가 A를 침대 위로 끌고 올라왔다. 크게 좁지는 않았지만 원래 2인용 침대가 아니라 넓은 1인용 사이즈이기 때문이 약간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굳이 B의 방에서 두 명이 함께 잠에 드는 데에 약간의 변명이자 부연설명을 해보자면, 넓은데다 드라마에 나올 듯한 2층집이라 방도 많을 거라 생각했던 A는 일일이 침실이 될 만한 방을 찾아보고 나서야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방 같아 보이는 곳은 창고, 드레스 룸, 게임기가 쌓여있는 방 등 오로지 그 용도가 취침은 아닐 것으로 보이는 곳들 뿐 이었다. B의 말을 들어보니 그나마 멀쩡한 침실은 B의 방과 그의 부모님의 방 뿐 이었는데, 아무리 사건이 사건이라고는 해도 부모님 방에 멋대로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A의 선택이었다. 평소에 놀러 와서는 죽치고 있는 곳이 거실이나 게임기가 있는 방, B의 방 정도이니 다른 방들이 어디에 있는지 본 적이 없었던 A는 난생 처음 창고가 이렇게 넓을 수 있는지 얼마 전에 확인했다. 다른 곳에는 별로 관심을 둔 적도 없다 보니 사실은 B의 부모님의 방에 어디인지 조차 몰랐다. 방으로 올라가는데 언제나 지나쳤던 방에 오늘은 뭔가 신경이 쓰였다. 부모님 방이 여기인가? 하는 마음에 A는 안을 조금만 보려고 문고리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탁 잡고 내렸던 문고리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자 문이 잠겨있는 것을 알고는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 왜 집 한가운데에 있는 방이 잠겨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보통 창고가 이런 곳에 있나? 아니면 방공호에 들어가실 때 문을 잠그고 나오셨다던가…. 요즘 들어 끊임없이 증식해가는 의문점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A를 찾고 있던 B가 굳은 표정으로 이쪽으로 달려 나왔다. 문고리 위에 얹혀진 A의 손 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얹혀졌다. 표정이야 언제나 그렇듯 금방 변했으나 왜 아까와 같은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던 A에게 B가 물었다.
"왜 이런 곳에 있어? 금방 올라오겠다고 했으면서."
"잠깐 이 방이 뭔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살짝 당황하는 듯한 B를 보니 말하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비밀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자 B가 나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A는 변화무쌍한 B의 안면근육에 경외를 표하면서 이왕 궁금해졌으니 깔끔하게 물어보자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 방은 무슨 방이야?"
"부모님 방이야."
어쩐지 순순히 대답해주는걸 보니 더 꺼림칙했다. 뭐 숨기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며 단단히 삐쳐 풀이 죽을지도 몰라 괜한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A는 그 대신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안에 뭐가 있는데?" 어쩐지 의뭉스럽게 물어오는 A에게 B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A는 지금 한 말의 어디가 찔릴 부분이었는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안에는 침대가 있지. 2인용이야. 왜, 이왕 자는 거 넓은 침대에서 자고 싶어서 그래?"
"또 다른 건 없어?"
A는 B의 장난스러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서는 덧붙였다. B가 정말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A는 역시 B가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평소에는 둔한 주제에 이럴 때만 집요하다니까. B의 중얼거림에 A가 뭐? 하고 반문했다.
"A, 너에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잠긴 문을 열수 있는 열쇠를 줄 수 있지만 이 방은 안 돼."
"왜?"
"그건 개인 사정인데……."
나는 너한테 지금까지 비밀 하나 없이 다 말했는데 아주 조금은 실망이다, 라는 A의 무언의 표시를 읽은 B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풀이 죽은 A에게 어떻게 하면 기운을 북돋아주면서도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까 하는 갈등이 담긴 눈빛이었다. 어차피 양립이 불가능한 선택 사항이었다. B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A, 그런 게 아니야. 언젠가는 너도 이 문을 열 수 있을거야. 아마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안을 보여주는 건 조금 곤란하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야 안 될 것도 없지."
"…네가 무슨 푸른 수염이냐."
"적어도 이 안에 시체는 들어있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어."
"뭐야 그게. …어차피 캐물을 만큼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어. 이제 들어가자."
2024년 2월 12일, 월요일 아침.
오늘도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A는 습관적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사람들이 사라져 수도가 끊긴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일주일에 몇 번 씩 그걸 잊은 채로 이런 멍청한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점점 그 빈도가 줄어들고 있기는 했지만 실로 자신이 한심해 보이는 일이었다. A는 눈을 감고 하품을 하며 뒤를 돌아 나오려고 했다. 귀에 어떠한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적거려 보았지만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마침내 A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A는 수도꼭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지만 이건 확실히 물의 감촉이 맞았다. 막 A를 따라 나온 B에게 뺨을 좀 꼬집어보라고 했지만 아팠다. 물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A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면서 세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A와 달리 B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눈치였다.
"물이 나오는데 안 신기해?"
"사람들이 돌아 왔나보지 뭐."
A가 묻자 B는 덤덤하게 대답 한 후에 하품을 했다. 하긴 수도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건 그런 뜻 인건가, 정말 괜찮으니까 사람들이 나온 거겠지? 그럼 우리 이제 죽을 일 없는 건가? 하는 생각들이 A의 머릿속을 스쳤다.따뜻한 물로 씻는 것은 꽤 오랜만인 듯 했다. 욕실을 나오자 밖에서 B가 수건을 건내주었다. 대충 목에 걸고서는 밖에 나가려고 겉옷을 입은 A를 B가 감기 든다며 잡아 세웠다. 얌전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는 B에게 어쩔 수 없이 붙잡힌 A는 날도 꽤 풀렸는데 감기는 무슨 감기냐며 불퉁거렸다.밖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제 이 사건은 인류 급의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자 흑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웃기기도 했다. 그럼 오늘은 시청 앞에 아무도 없겠지? 한번 가볼까, A가 B를 이끌었다. 예상과는 달리 저번보다 적은 수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했었다. 모두 상당히 놀랐는지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로써 A는 시청 앞 사람들이 아침마다 모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쓸데없는 궁금증이 해소되자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며칠 전에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던 남자가 끼어있는 것을 본 A는 사람들도 모두 돌아왔으니 다시 아르바이트나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네 부모님도 이제 오시겠네."
"어… 좀 늦으실 지도 모르고."
하긴 두 사람이 B의 집에서 나온 게 몇 분 전이었는데 조금 더 늦게 들어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별일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A는 고개를 흔들어 망상들을 떨치고서는 우유 배달 집 사장님께 잘 계셨냐는 안부인사라도 해야겠다며 웃었다.
"집에 안 갈 거야? 부모님 얼굴 보고 와야지."
"됐어,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데."
B는 어째서인지 집에 가라고 닦달해도 찰거머리처럼 쫄래쫄래 A의 뒤를 따라다녔다. 어쨌든 가게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고 답이 없자 그대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A가 찾으려던 사장님은 안 계시고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여기 사장님 안계시나요?"
"내가 여기 사장인데?"
아니 이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A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재촉하자 말 그대로의 의미라며 A를 째려보았다.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는 듯한 그 눈빛에 A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몇번을 확인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장님은 모른다고 하는 모습에 내 기억이 이상한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아무리 사장님이 아직 안오셨다고 해도 지금 이 사람이 하는 건 명백한 사기가 아닌가?
"A, 나가자. 저 사람 눈빛이 이상해."
B가 작게 속삭였다. 사기꾼은 듣지 못했는지 계속 빨리 나가버리라는 신호만 주고 있을 뿐이었다. 눈빛이 이상하다니? 나오면서 작게 묻자 B는 A의 손목을 잡고 조금 먼 곳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골목 사이에 들어가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도둑이라도 됬다면 불안한 기미라도 보였을 텐데, 그게 아니였단 말이야. 정말로 우리가 이상한 사람인 것 처럼…. A는 잠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다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미친 것 같다는 거지? B는 잠깐 고민하다가 조금 다르지만 말이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고 답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혹시 다른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생겼으면 어쩌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기, 사장님 계세요?"
이번에는 전단지 아르바이트 사무소였다. 이번에는 아니겠지, 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A는 정말로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불길한 예감은 정말 빗나가질 않는구나. 그 즉시 달려나와 사람이 많은 장소로 달렸다. 뭐야, 일이 어떻게 되 가고 있는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죽는다고 생각했던 때 보다 지금이 훨씬 무서웠다. B는 A의 차가운 손을 감싸쥐었다. 떨림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갈까?"
A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A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싶었던 B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A는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아까의 우유집 사기꾼의 눈빛보다는 훨씬 위험해 보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A는 정신을 어디에 빼먹고 있는지 길을 걷다가 하수구의 뚜껑에 발을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발목이 삔 것 같다고 짜증을 부리는 A를 B가 억지로 등에 업어 데리고 간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우유 마실래?"
"나 핫초코 타줘."
데운 우유를 한 컵 담아주려고 말을 꺼냈더니 단 것을 좋아하는 A가 떼를 쓰는 느낌이었다. 어린애 입맛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A는 데운 우유를 장말 싫어했다. 그나마 핫초코 정도라면 먹어 줄 수도 있지, 하는 말투로 꺼낸 말에 B가 군말없이 갈빛 가루를 찬장에서 꺼내자 A는 조금 기뻐하는 눈치였다. 핫초코를 마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 B가 자신의 어리광을 들어준다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까의 굳은 표정보다는 조금 편안해 보이는 얼굴에 B가 마음을 놓았다. 꽤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저기, B."
"왜 그래?"
"부모님 아직 연락이 없으셔?"
"일이 바쁘신건지도 모르지. 수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
"아직 연락 안 해봤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지금 해볼까?"
이런걸 진짜 아들이라고…. A는 있지도 않은 자신의 아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고 생각했다. B는 손목에 차고 있는 휴대전화에 어머니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긴 수신음이 계속 이어졌다. 이윽고 아버지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바쁘실 거라고 했잖아?"
바쁘셔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까의 전례가 있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두운 생각은 하면 할수록 더더욱 뻗어나가고, 상상에 살을 붙여 음습한 기운을 만들어 내는 듯 했다. 부모님이 돌아오시지 않은 날도 꼭 그랬었다. 맑은 날인데 어딘가가 불안했다.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날 하루의 끝은 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다. 나쁜 일이 있을 것 같다 싶은 날에는 정말로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지금도 충분히 불안했는데, 당사자인 B가 저렇게 여유로우니 자신이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아, 오시는 것 같은데?"
"진짜? 다행이다…."
"무슨 걱정을 사서 하고 있냐."
B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창문 너머의 정문이었다. B의 부모님 두분이 차를 타고 오시는게 보였다. A는 그 검은 차가 어찌나 반가운지 곧바로 1층으로 달려갔다. 반면 진짜 아들인 B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하고는 A의 걱정만 하고 있었으니 누가 진짜 아들인지 부모님 입장에서는 헛웃음만 나올 노릇이었다. 이미 A는 신발까지 신고 정원으로 달려나간 채였다.
"아줌마! 어디 다치신데 있으신건 아니죠?"
"어머, 얘는. 내가 나이가 몇인데 벌써 아줌마 소리를…."
아줌마라는 말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정말 B의 어머니가 맞았다. 그리고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다쳐? 라는 그녀의 말에 A는 하긴 지하에 계셨으니까요. 별 다를 일도 없으셨겠죠. 라고 답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대꾸는 되려 반문하기에 딱 알맞았다.
"지하? 내가 왜 지하에 있니?"
"네? 아, 방공호 말이예요."
"방공호?"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물음을 했다. 당황한 A가 고개를 돌려 B의 아버지를 보고 "아저씨…?" 하고 작게 불렀으나 그도 A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말만 했다. 자신을 놀리고 계신 건가? 정말 지금까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B도, B도 함께 있었는걸. 갑작스럽게 B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B는 어째서인지 그의 부모님에게 눈초리를 받고 있는 듯 했다. 왜 그러세요? 물은 A에게 부모님 두 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B의 어머니가 귀 뒤쪽에 걸쳐진 머리를 한참 만지시더니 일이 있다고 집에 들어가버렸다. 이제 나갈까? 하며 A의 등을 떠미는 B의 목소리를 들으며 A는 생각했다.
저 버릇, 유전이었구나.
"별 일 없었나봐."
"다행이네."
"그렇지?"
"응."
A는 그래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처의 사장님 두 분이 보이지 않는 것도 꺼림칙했고, B의 부모님의 반응도 영 수상했다. 내가 알고 B가 아는데 그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일을 없었던 것 취급 해버렸다. 아주 간단히.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날들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 이었지? 겪었던 일들은 간단히 없던 것 취급하는 건 아직 A에게는 버거웠다.
"어디에 가려고?"
"네가 궁금해 했던 것들을 알려주려고. 싫어?"
그걸 왜 이제와서…. 그 방의 문을 열지 말라고 다그쳤던 것이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이 고민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것들도 다 해결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속을 두드려 왔다. 어딘가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저 손을 잡아. 그러면 넌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거려 왔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A는 생각했다. B가 나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머릿속에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A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않아도 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듣는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도 없겠지."
"맞아. 내가 너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럼 왜 그걸 내게 말해주려고 하는 건데?"
"네가 궁금해 하니까."
B가 씨익 웃었다. A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도망쳐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했다. 꼭 이런데에서 나쁜 버릇이 나오기 마련이다. B와 그의 부모님이 거짓말을 할 때에는 귀 뒤의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A는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A, 진정해. 네가 파우스트가 아닌 것처럼 그도 메피스토같은 악마가 아니야. 영혼을 담보로 하는 계약도 여기에는 없고, 이 손을 잡아도 지금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거야.
A는 그렇게 B의 손을 잡았다.
2024년 2월 12일, 월요일 오전.
B가 A의 손을 끌고 들어간 곳은 어두컴컴한 방공호였다. 사람 수를 따져 보면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법 한데 안은 텅 비어있었다. 사실 A는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문이 열려 있었던가? 아니면 B가 열어버린걸까. 어떻게 연 거지? 마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것처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시야가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발달해 오는 것처럼 피부와 후각은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공기가 끈적했다. 독기(毒氣)와도 같은 무언가들이 사방에 즐비해 있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저기, B. 내 앞에 있는 거 맞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눈을 아예 감아버리고 내 손을 잡고있는 손을 구원의 동앗줄처럼 세게 움켜쥐었다. 부디 이 손만은 허상이 아니기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A의 감긴 눈꺼풀 속을 비틀어 열고 흘러 들어왔다. 기괴한 색이었다.
"눈 떠도 괜찮아."
사실 B는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A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A는 B의 손을 놓고 눈 앞을 가렸다. 조그맣게 벌어진 틈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B가 A의 눈 위에 올려진 손을 걷어냈다. 나는 이것을 똑바로 마주해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잡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곧이어 눈꺼풀이 떠졌다. 강한 빛은 동공을 찌르고, 뒤이어 귀에서 찢어지는 듯 한 이명이 들려왔다. A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B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고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멍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는 B의 이름을 불렀다. B, 아파. 죽을 것만 같아. 마지막으로 A가 눈에 담은 것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자신을 품에 안는 B의 모습이었다.
2024년 2월 15일, 목요일 오후.
일어났어? 다행이야, 걱정했거든. 네가 기절한 게 벌써 삼일째가 다 되던 참이었어. 의사는 단순 기절이라고 했지만, 나는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자꾸 똑같은 소리만 계속 지껄이니까 그냥 꺼져버리라고 했어.
심한 말이라니, 내 생각은 안 해주는 거야? 물론 내 잘못이 없다고는 하진 않겠지만 네가 영영 깨어날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만…. 화 내는거 아니지? 아니, 뭔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라서 말이야. 귀 쪽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그건 며칠 있으면 괜찮아 질 거야. 나도 처음에는 그랬거든. '우리'는 그걸 처음 봤을 때 그냥 어지럼증에 조금 시달리는 정도였으니까. 멍청하게도 '우리'와 너는 다르다는 사실을 문득 잊고 있었어. 정말 미안해. …화 낼거야?
아, 물론 나도 네가 이런 일 가지고 내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닌 걸 알아. 하지만 너에 관한 일이니까 유독 민감해지는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응. 착하다. 부엌에 가서 코코아 좀 타다 줄까? 물론 마시멜로 듬뿍 넣고서. 괜찮다니, 꽤 추워보이는데 그거야말로 괜찮아? 몸을 떨고 있잖아. 이불이라도 좀 덮어봐. 더 두꺼운 걸로 가져다 줄까?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면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 뭐? '우리'가 누구냐니, 한 박자 늦네. 아까 묻지 않고 넘어가서 별로 관심이 없는건가 싶었어. 설명하자면 길긴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이 곳,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너와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네. 신체 구조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용물은 같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궁금해 하는 건 이런 게 아니잖아. 설명하려면 좀 옛날부터 말해야 하는데, 지루할지도 몰라. 괜찮아? 나야 뭐, 괜찮아. 네가 듣고싶다면야 뭐든 말해줄 수 있으니까.
너무 상식 규격 외의 발언이라 조금 상상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머릿속에 한번 우주를 그려봐. 어마어마하게 넓다고는 하니까 그 속에는 지구와 꼭 닮은 행성이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르지. 그야말로 쌍둥이 별 같은… 시간축이 비틀어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지구 말이야. 시간축이 비틀어졌다는 의미는 그냥 쌍둥이 별 쪽이 과학이나 문명이 더 발달되었다던가 하는, 그런 쪽의 비유야. 그런데 생각해봐. 지금에 와서도 지구는 영 쓸만하지 못한 별이 되어 있어. 이미 예전부터 일어나고 있던 일들이지만 거의 폐품이 다 되어가는 중이지. …넌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내가 이 뒤에 할 말 까지 생각해냈을지도 몰라. 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보이는 데에다가 머리를 굴리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내가 너의 뇌 회전을 막을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마도 네가 예상한 것과 별로 다르지는 않을거야.
지금 이 지구도 상당히 오염되어 썩어가고 있는데, 그보다 조금 더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닮은 쌍둥이 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말이야, '우리'는 계획을 세웠어. 아, 걱정하지 마. '우리'라고는 해도 내가 태어나기 조금 전 일이니까. 대충 20년 정도 전이 아닐까 생각해. 어쨌든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존재하는 행성 중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으며 아직 복원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자연을 가진 곳을 찾았어. 하지만 이내 고민했지. 저렇게 먼 곳인데 갈 수나 있을까,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였지. 사람들은 슬퍼했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는 방도가 눈앞에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런데 말이야, 때마침 어떤 나라에서 좋은 통로가 만들어진거야. 하지만 그곳을 맡고 있던 총책임자는 그 통로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짐작도 할 수 없는 우주 어딘가로 떨어져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라져 버렸지. 현존하던 모든 과학자들은 그 통로에 매달렸어. 인류가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통로를 통제 하에 두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지. 음, 이게 대충 15년 전의 이야기야.
통로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 처음에는 사형당할 범죄자들을 이용했어.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자 지원자를 받았지. 하지만 누가 그런 승산도 없는 게임에 목숨을 걸었겠어? 만약 예외가 있어도 그 수는 너무나도 적었지. 그러자 세계 정부는 제안을 걸었어. '만약 지원자가 통로를 무사히 건널 수 있다면 첫 번째의 성공자에게 우리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모두 도착했을때에 지도자가 될 권리를 주겠다.' 물론 지원자의 수는 폭발적이었어. 그렇게 무의미한 희생이 계속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이었어. 내가 여섯 살 때였나, 어머니는 그 실험에 우리 가족이 함께 참여하자고 했어. 뭣모르는 아이인 나는 제쳐두고,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했지. 하지만 결국에는 그 실험에 참여하게 됬어. 음, 그런 가능성도 거의 없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 것이 권력 때문이냐고? 글쎄. 난 아버지의 속마음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선택의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어머니가 그 무지막지한 실험을 하고 있었던 과학자중 한명이셨기 때문이 아닐까.
난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어. 여섯살 짜리 애가 뭔가를 깊이있게 고민하기에는 어머니가 입에 넣어주신 캬라멜이 너무 달았거든. 그때 한 순간 뇌수까지 녹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뭐 여섯살 이니까 말이야.
결과만 떼놓고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했어. 어떤 원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 가족에게 어떻게 해서 이 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냐 물었어. 아마도 다음의 실패를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겠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몰라요.' 라고 답했지. 통로를 넘은 건 정말 순간이었으니까. 기억 나는 것은 귀에 닿았던 온기 정도?
어머니는 그곳에서 꽤 비난을 받았던 것 같아. 권력을 얻기 위해 통로를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숨겼다고 했던가. 그 때문에 우리는 신세계의 지도자가 될 권리는 박탈당했어. 자신들이 걸어놓고 주기는 아까웠던 모양이야. 그런데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도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 이 곳에서 조사한 것을 그곳으로 넘기면서 덧붙였지. '귀를 막으세요.' 아마 내 귀에 닿았던 온기는 그녀의 손이었을거라고 생각해.
어쩐지 피곤하다는 얼굴인데, 조금 잘래? 그닥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니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될텐데. 결말은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계속 듣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성간이동을 하는 법을 그들, 아니. '우리'는 알아냈어. 하지만 또 문제가 있었지. 바로 그 땅덩어리에 살 수 있는 사람의 수야. 지구는 우리가 살던 곳 보다는 조금 작았어. 가뜩이나 사람이 넘쳐나는 곳에 사람을 더 부을 수는 없었지. …며칠 전의 소동들은 아마도 '우리'의 짓이겠지. 아니면 더럽게도 운이 좋았다던가.
이제 더 할 말이 없는데.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아, 사라진 사람들은 어떻게 됬냐고? 글쎄, 그거야말로 나는 모르는 일이야. 네가 알다시피 내 진로는 이공계가 아니라서.
맞다, 그 방은 지금 보면 그때 보여줘도 상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별거 아니었어. 어머니가 그들에게 정보를 보낼 때에 쓰던 장비들이었으니. 지하실에 물이 많은 것도 몇 가지 실험 때문이었고.
…네 표정을 보니까 조금은 괜히 말했나 싶은 생각도 드네. 네가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우울해하는 건 보기 싫어. 사실 숨기려고 한다면 끝까지 숨길 자신도 있었어. 네게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는 만나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이 말을 꺼낸 것도 조금은 도박이었어. 너는 내가 사람을 죽여도 아무 일 없이 평소처럼 대해줄 사람이니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뭐? 네가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뜬금없지만 재미있는 말을 하네. 글쎄, 네가 들으면 기분나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기뻐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너와 비밀을 한가지 더 공유하게 되는 거잖아? 그건 내게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기쁜 일이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너는 대체적으로 네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그냥 피해갈 성격이니까. 악담처럼 들려? 하하. 나는 너의 그런 점을 좋아하는건데.
팔목에 자국이 났네. 너무 세게 묶어뒀었나봐. 사실은 네가 다 듣고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계속 픔고 있었거든. 너를 못 믿었다기 보다는 나를 못 믿은 거지. 잠깐만, 지금 풀어줄게. 며칠이나 햇빛을 못 보니 이렇게 말라서는….
자, 그럼. 일단 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나갈까? 부엌에 가서 따뜻한 코코아 한 잔 타 줄게.
(꽤 예전 작품이라 문체는 2차 쪽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합니다!)